잊지는 말아야지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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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동안 원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 있는 어두운 역사의 유적지와 유물들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던 것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유적지들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를 다시 되새겨, 직접 보고 느껴서, 다가오는 미래세대인 우리 후손들이 대처해야 할 방안을 일깨우고, 이 땅에 다시는 어두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교육의 현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라 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돌이키기 싫은 역사이지만 제대로 알려서 국가 안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구한말 혼란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통과 한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를 반추하고 전쟁 패배와 정책의 실패로 인한 조상들의 처절했던 삶들을 어두운 역사의 현장에 있는 유적지 답사와 유물들을 통해 다시는 그러한 고통과 고난으로 허덕이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인식을 고취함에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 군산과 일제강점기의 흑역사 현장들
-기름지고 풍요한 조선인의 땅에서 생산된 품질 좋은 쌀은 생산되자마자 군산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조상들을 한과 고통으로 응어리지게 만든 식량 수탈의 서막이었다.
주식이었던 쌀을 수탈당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보리와 잡곡으로 연명했으며 더 나아가 식량의 부족으로 산과 들의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이듬해의 수확까지 버티며 굶주림과 온갖 고통을 참아내야만 하는 많은 세월을 반복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제물포, 목포와 함께 서해안의 3대 항구였다.
임피와 옥구, 너른 평야를 끼고 있는 군산은 호남의 대도시인 전주와 가깝고,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인 강경과도 가까웠다.
1899년 개항한 군산은 비옥한 평야이면서 바다에 인접해 있는 평화로운 도시였다. 이러한 군산의 지정학적 이점을 파악한 일제의 이익 앞에서
원통하게도 일제강점기에 우리 조선 땅의 군산이 식량 수탈의 최전방으로써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주도한 산미 증식계획, 농촌 진흥 운동으로 생산된 쌀 등 곡식들은 도로와 철도를 통해 군산으로 집적되었고 군산 항구에서 선박으로 일본의 오사카, 고오베, 도쿄 등으로 반출되었다.
□ 조선은행
1879년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진출하여 설립한 일본의 국립 제일은행을 1909년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구한국은행이 인계했을 때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군산출장소로 시작하였으며 주요 업무는 군산항을 통해서 반출되는 쌀 수익금을 예치하고 농지매입을 위해서 자금을 빌려주는 일이었다.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개명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직속 금융기관 역할을 했으며 해방 이후에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으로 바뀌었다.
조선총독부 농립국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2년 후인 1912년 비해 6년 후인 1918년에는 쌀의 수확량이 절반 이상이 늘어났다고 했다.
그 반면에 일본으로 수탈되어 나간 쌀의 물량은 세 배나 늘어나서 조선인들의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는 궁핍하고 초라함을 넘어서 통곡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군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세워진 조선은행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땅에서 많은 토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큰 자본을 빌려줌으로써 어렵지 않게 넓은 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일본인들은 쉽게 치부할 수 있는 군산에 삶의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착해 살았다.
대표적으로는 포목점을 운영하며 거대한 부를 일궜던 히로쓰 게이사브로의 일본식 가옥은 적산가옥으로 지칭되어 유명하며 아직도 군산 시내 신흥동에 남아있다.
193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군산 토지의 80%가 일본인 소유였으며, 또한 옥구 지방의 농경지 60% 이상이 일본인의 소유였다고 한다.
조선의 농민들은 60~70% 이상이나 되는 소작료를 짊어진 채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그 시대에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나라 잃은 민족의 항거할 수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군산에는 아직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상흔으로 군산세관, 조선은행, 조선미곡창고, 일본식 사찰 동국사 등이 군산의 곳곳에 남아있다.
□ 적산가옥
적산가옥이란 의미는 적의 재산으로 만든 집이라는 뜻으로, 적들이 만든 집을 의미하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지은 집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인들이 군집했던 지역에는 지금도 제법 많은 수가 남아있다.
그리고 기와와 지붕만을 일본식으로 개량한 한옥들은 군산 시내를 돌아다녀 보면 상당히 많이 산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체결 이후 일제는 조선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조선의 농수산물 및 귀중한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 수탈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부 일본인들이 조선 각지에 촌락을 형성 일본식 가옥을 지으며 살았고, 이들은 조선이 일본의 일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조선의 땅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
10년이 흐른 1930년대에는 일본식 가옥들이 증가하게 되어 조선의 곳곳에 일본식 가옥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조선을 자신의 땅으로 여긴 일본인들은 일본의 국화 벚꽃 등을 조선 땅의 곳곳에 심으며 유희하고 생활하며 조선의 거리 거리마다 게다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점차 일본의 문화를 퍼다 날랐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이 광복을 얻자,
일본인들은 어두운 밤을 통해 몰래 집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미 군정에 의해 추방되었다.
일본식 가옥들은 빈집으로 남게 되고 조선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부서졌다.
1945년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일본식 가옥들은 미군정청령에 의해 미군정이 특별관리를 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령에 따라 남한에 소재한 일본식 가옥들은 대부분 국유지로 지정하고 적산가옥으로 지칭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 이후 자국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한일수교 얘기가 나오자 일본인들은 적산가옥을 자신들의 사유재산으로 고집하면서 기를 쓰고 찾으려 했다.
한일수교 이전에는 일본 정부 안에서 한국 정부가 몰수한 일본인 자산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는데, 한국인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조약 위반이라는 논란 때문에 한일기본조약을 맺으면서 일본 정부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남긴 적산에 대한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함을 명시해 이 문제는 끝을 보게 되었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든 적산가옥들은 대다수 헐리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사의 청산이라는 이유로 헐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든 시기도 있었으며, 이러한 건물들은 보존되어 흑역사를 되새김으로써 국가 안위에 관한 국가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훈적 차원의 인식은 없었다.
철거되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 되거나 리모델링해 커피숍이나 상점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 조선미곡창고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정식 명칭이며 일제강점기 경성부 기업이고
보통 조선미창이라 불리어졌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쌀 때문에 일본의 쌀값이 폭락하자 일본 농민들의 불만으로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서 일본이 만든 기업이었다.
1930년도에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창고에 저장하는 일과 화물업도 병행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는 조선에 있는 미군정청하의 정부에 귀속되었다.
1962년 조선운송과 합병되었고, 1968년 민간기업의 동아그룹에 넘어갔다. 조선미곡창고 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조선의 식량을 철저히 관리하여 자국 일본으로 반출한 일제의 식량 수탈 행태는 약탈의 극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지금의 씨제이 대한통운이 전신이다..
□ 군산의 해망굴
국가등록문화재
전라북도 군산시 해신동에 소재한 터널로써 2005년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1926년도에 구 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만든 반월형 터널이다.
당시에 이곳은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었고 교통의 요충지였다.
인근에는 군산 신사와 신사광장, 공회당, 도립군산의료원, 은행사택, 안국사 등이 있었다.
해망굴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있는 귀중한 물자를 용이하게 반출하기 위하여 만든 터널로써 1926년 군산의 내항과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터널이며, 곡창지대이며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곡식을 철도와 도로를 통해 군산으로 모집하여 항구에서 선박으로 일본에 운송하는 과정 속에서 시내의 물자를 보다 빠르고 쉽게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반월형 터널로 길이가 130미터이며 현재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사람들만 왕래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 인민군 부대가 지휘소를 설치한 까닭으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것을 터널 곳곳에 남아있는 총탄의 흔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 임피역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에 위치한 기차역으로서 군산선의 간이역이다.
1924년 6월1일 영업을 시작하였다가 2008년 5월로 여객 운송 업무가 중단된 간이역이다.
이미 폐역이 된 임피역은 일제강점기에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곡식을 수탈하여 군산항으로 옮겨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간이역으로 건립되었다.
임피역 주변으로 당시에 쌀 저장창고가 여러 곳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아직도 우리 조상들의 강제 노역으로 곡식은 물론 피와 땀과 혼까지 수탈되어 고통으로 인한 신음 소리가 지금도 흘러나오는 듯하다.
단군 이래로 우리는 수많은 외침과 자중지란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 조상들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위기에 대처한 지혜로운 노력들이 지금 이 시대에 그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 만큼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발전하고 풍요를 누리는 국가가 흔치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문명과 눈부신 경제 발전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여겨지며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은 그 어떤 외세에 의한 침략들보다 고통과 고난을 안겨 준 역사는 드물다 하겠다.
섬나라 일본인들의 호전성은 바다 끝 수평선 너머에 대한 호기심이 태생적으로 dna화 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 듦은 임진왜란 7년간의 전란과 임진왜란 훨씬 전부터 수없이 많은 침탈을 자행해 왔다는 사실들을 사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다. 라고 누군가가 말을 했고, 또한 그러하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의 십만 양병론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21세기 글로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구상에서 오늘도 이데올로기와 혹은 종교 문제와 자국의 이해득실 앞에서 살상 무기로 전쟁을 일으키고 자본을 통한 그리고 자원을 앞세워 소리 없는 전쟁을 유발하며 철저한 힘의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수천 년을 유지하면서 내려온 우리의 역사 속에서 침탈당하고 고통과 고난의 역사를 눈앞에서 보듯이 되새겨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참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잊지 말도록 이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마음에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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