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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 ( 백제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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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꿈이있는세상 댓글 0건 조회 159회 작성일 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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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

1. 온조가 세운 백제와 별도로 비류가 세운 나라도 존재했을까 ??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부여를 탈출한 주몽은 졸본에서 연타발의 딸 서소노와 혼인한 후 고구려를 세웠지만 후계자는 동부여 당시 유씨부인의 아들 유리를 데려다 왕위를 계승시켰다. 이에 전남편의 자식이던 비류를 태자로 삼고자 했던 서소노는 유리왕 즉위 직후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망명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는데, 비류는 땅이 습하고 살기 어려워 죽었다는 것이 백제의 건국 기록이다. 상식적으로 땅이 습하고 물이 짜면 옮기면 되는데 죽었다는 것은 논리가 부족하고, 백제본기 비류측의 잔결문(殘缺文)에는 비류 역시 동이강국(東夷强國)’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비류가 건국한 미추홀과 온조가 건국한 위례성은 어느 지점인가. 삼국사기는 미추홀을 인천으로 보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미추홀은 인주이며 위례는 금일의 직산(彌鄒忽仁州 慰禮今稷山)’이라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핵심은 미추홀은 그냥 인주로, 직산은 금직산으로 금()을 부가하여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저작 당시 금인주는 인천이지만 그냥 인주는 아산군 인주면이라서 미추홀이 인천이라면 미추홀도 금인주로 기록해야 했다. 삼국유사에 따라 금직산이 천안군 입장면 위례산이라고 보면 비류·온조 백제 양국은 안성천 유역 즉 평택평야 중심으로 서로 가까운 지점에 세워졌다.

또 온조 13왕도(위례성)에 늙은 여우가 남자로 둔갑하고, 오호가 공격하여 왕모를 죽였다. 61세였다. 5월에 온조가 국모를 살해 했으니 나라를 옮겨야겠다. 다음해 광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다. 즉 비류 측의 오호가 공격하자 온조 측의 강경파가 비류 편을 들던 서소노를 살해한 후 반격을 피해 지금의 하남 위례성인 북쪽으로 쫓겨 갔다는 기록으로 이를 보면 애초 백제가 건국된 위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맞다하겠다.

온조백제는 국호를 처음 십제(十濟)로 하였다가 백제(佰濟), 백제(百濟)로 바꿨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 백제전에 의하면 처음부터 백가가 바다를 건넌다는 의미에서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온조가 세운 십제와 비류가 세운 백제 두 나라가 동시에 병립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비류백제는 해상왕국이었을까 ??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해외 진출 기록은 372년 근초고왕 때 남중국 동진과, 397년 아신왕때 왜와 최초로 접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중국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백제국은 서쪽경계는 바다건너 월주(오늘날 항주만 남부 연안)에 이르고, 남쪽경계는 바다건너 왜국(북큐슈)에 이르며, 북쪽경계는 바다건너 고구려(요서지방)에 이른다.’고 했다. 우리기록과 달리 중국기록은 백제가 중국이나 일본과 접촉한 시기뿐만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단순 왕래가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 영토를 개척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실 확인을 위해 진나라역사서인 진서를 보면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인 함강 8(342) 선비족인 모용황(전연)이 중국북쪽 요동 요서 지역의 정세를 기술한 내용에 고구려, 백제, 우문, 단부의 무리들은 모두 병세지도(兵勢之徒)’라 하여 요서지방에 이미 백제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송서나 양서 등에도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가 요서를 점거하여 진평 등 두 군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도 북위가 병력으로 내침했지만 백제에게 패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통전에는 (만리장성)근처 무리들과 그 군주 부여승은 국토(백제본국)가 신라에 진몰되어 환국할 수 없자 소멸되었다.’라고 하여 요서백제의 멸망 시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3. 두 백제의 지배 영토는 ??

양서에 의하면 비류백제는 22개 담로가 있으며, 여기에 자제종친을 분거하였다.’고 하여 중국 주나라와 유사하게 분권제로 나라를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폴리스를 건설하면서 해외로 진출했듯이 비류백제인들도 담로를 건설하면서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진출하였다. 삼국사기에 209년 포상팔국이 아라가야를 공격하는 등 수차례 가야를 공격했으나 신라의 개입으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포상팔국은 각 담로들의 진출기록이다. 일본서기에는 포상팔국이 패하자 본국에 요청하여 신공49(227) 목라근자를 사령관으로 한 비류백제의 원정군이 김해가야 등을 점령시켰다는 기록이다.(이때 김해가야 중심의 전기가야는 사실상 소멸되고 비류백제가 망한 후 407년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가 재건된다.) 이렇게 개척된 백제의 영토는 응신8년 황해도 예성강 유역의 곡나, 충청도 지역의 지침, 전라도 지역인 현남, 경상도 서부지역인 동한지지, 제주도의 침미다례의 5개 권역으로 서남해역 전역을 장악한 국가였다는 기록이다. 즉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의 영역인 한산 이북 황해도 곡나지역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위지에 ‘147-188년경에 백성들이 백제로 귀순하여 낙랑군도 통제할 수 없자 이를 정벌하기 위해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황해도 지역의 비류백제의 강성을 막기 위해 대방군을 설치함으로써 비류백제는 예성강하류 곡나로 밀려 남하했지만 그 후로도 대방측과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왜에 칠지도를 보내 신공을 왜왕에 봉하는 대신 원병을 요청했으나 왜는 오히려 대방군에 회유당하여 위와 왜가 연합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비류백제는 온조백제와 혈맹관계를 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238년 온조백제의 고이왕이 부산을 순시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는 기록이다. 왕이 오산읍(부산)50일간 장기간 머문 것은 두 나라가 화합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 후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점령하고(313-314) 남하하자 백제연합을 결성한 비류백제는 고구려 후방을 견제하기 위하여 중국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여 요서백제를 건설하였고, 온조백제는 백제연합의 우위에 따라 371년 근초고왕 때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도읍지도 한산(광주)에서 한성(서울)로 천도하는 북진전략을 추진하였다.

 

4.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는 어떻게 변천되었을까 ??

이러한 백제연합의 군사적 우위를 붕괴시킨 것이 광개토왕이다. 광개토왕은 즉위 2(392) 멸악산맥을 넘어 백제연합의 북방요새이자 비류백제의 전진기지인 예성강입구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백제연합의 한 축인 온조백제의 진사왕은 광개토왕의 용병술에 겁을 먹고 나가 싸우지 못하고 궁에서 소일하다가 급서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본서기는 일본 응신천왕(3)기각숙미를 파견하여 백제 진사왕을 견책하자 백제국은 진사왕을 살해하고 사과함에 따라 기각숙미는 새로 아신왕을 즉위시켰다.’는 것이다. 즉 짧은 기간 내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을 일본에 있는 응신천왕이 진사왕 나가 싸우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문책하여 죽이고 아신왕을 새로 즉위시켰다는 것인데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적 진실은 나중에 비류백제가 망한 후에 비류백제의 응신왕이 망명하여 왜왕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왜왕으로 등극하기 전 웅진에 있던 비류백제의 응신왕이 온조백제 진사왕을 징계한 것을 두고 왜왕의 치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도 응신왕이 왜왕이 된 이후에 실제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웅진 시기의 비류백제 응신왕과 망명 후 왜왕이 된 이후의 응신왕을 동일하게 보고 모두 왜왕으로 기록한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에 기록된 남침과정을 보면 백잔(百殘:온조백제)과 신라는 고구려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391)에 왜가 이들을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응신왕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옹립한 일). 이에 왕은 영락 6(396) 친히 수군을 이끌고 적의 남쪽을 공격하여 잔국(殘國:비류백제)을 토벌하고 58개성을 취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속민, 즉 백잔과 신라를 친 것은 왜인데도 왕은 엉뚱하게 잔국을 공격했고, 또 고구려는 기마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수군을 동원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강 유역의 온조백제를 치려고 했다면 수군이 아닌 예성강에서 직접 한강 쪽으로 남하하여 공격하면 된다.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영역을 피해 비류백제의 근거지인 웅주(공주)를 치기 위해 수군을 동원한 것이다. 광개토왕의 수송선단은 경기만을 지나 비류·온조가 도착했던 미추성으로 상륙하여 해상기지를 소탕한 후 웅진을 함락시켜 비류백제는 멸망한다. 그리고 잔주제(殘主弟)와 대신 10즉 비류백제 왕의 동생을 생포해서 귀환하는 길에 백잔국(온조백제)의 항복을 받았다.

광개토왕이 잔국을 토벌한 후에도 잔국의 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본서기에 잔국이 토벌된 응신 7(396)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함께 망명하였다.‘고 하여 역사상 최초의 집단 망명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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